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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3, 2015

the imperial portraits of Great Korea Empire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大韓帝国皇室の肖像

http://www.mu-um.com/magazine/?menu=exhibit&action=view&srl=714














1부: 대한제국의 탄생에서 한일강제병합까지(1880-1910)
1부는 흥선대원군의 초상으로 시작하여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관련된 사진을 통해, 대한제국탄생 직전에서 한일강제병합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1880년에서 1910년까지의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는 임오군란에서 비롯된 대원군의 천진 억류와 을미사변이 야기한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탄생, 그리고 한일강제병합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다. 특히 사진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구한말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고종의 사진과, 사진 제작의 주체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간 이후의 순종의 사진은, 대한제국이 쇠락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어 한일강제병합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다.

1-1.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다. 그는 고종이 성장한 후에도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며느리 명성황후와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끊임없이 재집권을 시도했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의 난도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의 힘을 빌린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청나라에 납치되기도 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곧 축출되었다. 1898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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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진을 좋아한 왕, 고종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12세의 나이로 조선 제26대 왕이 되었다. 15세에 명성황후와 결혼했으며,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환궁하여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밀사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본의 협박으로, 1907년 순종에게 왕권을 내주었다. 퇴위 후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서 거처하다 1919년 6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고종은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재위 1867-1912)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초상화에서 초상사진의 시대로 이행되는 시기의 첫 황제였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사진찍기를 싫어했던 것과는 달리, 고종은 1884년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魯越, 1855~1916)이 처음으로 고종 사진을 촬영할 때부터 사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후 1896년 비숍(Isabella Bird Bishop, 1931-1904) 여사가 사진기를 들고 입궐했을 때도 사진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촬영에 응해주는 등 기회가 될 때마다 사진기 앞에 포즈를 취했다. 현존하는 고종의 사진은 대부분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과 관계를 맺었던 서양인들이 촬영한 것으로, 서양인들이 출판한 조선관련 서적이나 잡지에 실린 경우가 많다. 이는 고종이 사진이라는 새로운 복제 수단을 외교적,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와 국왕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고종 사진을 촬영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이다. 그는 1883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의 미국 시찰단인 보빙사 일행의 자문역을 맡았고, 1884년에는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창경궁에서 이틀에 걸쳐 촬영했다. 그는 자신이 찍은 고종의 사진을 그의 기행문『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86, Boston) 속표지 사진으로 실었고, 책 속에는 한성부의 궁궐, 관료, 거리의 풍경 등을 담은 사진 22장을 게재했다. 이번 전시는 1886년에 발행된 책과 그 속에 담긴 사진 이미지들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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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얼굴 없는 왕비, 명성황후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 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中)

명성황후는 사후에 영의정 자리에 오른 민치록의 외동딸로, 16세에 왕비가 되었다. 타고난 총명함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확대하고, 대원군과의 대립관계 속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1894년에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러시아의 도움을 통해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 1895년 새벽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이끄는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 내 건청궁 옥호루에서 살해되었다. 사망 2년 후에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 해 11월 국장으로 홍릉에 안장되었다.

명성황후는 현존하는 삽화와 사진이 수많은 진위논란에 휩싸였으며, 아직까지 명성황후임이 분명하게 증명된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시에서는 명성황후의 재현이미지를 둘러싸고 일어난 진위 논쟁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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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한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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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이후 국왕의 권한과 영향력이 위축된 상황에서 고종은 1896년의 아관파천과 이듬해인 1897년의 경운궁 환궁을 통해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했다. 고종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다른 나라와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1897년에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원구단을 세워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국가상과 군주상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으며, 이러한 위상변화는 사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이 시기의 사진에서 고종 황제와 황태자 순종이 대원수 복장을 취한 것은 군통수권자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고, 근대적 국가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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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포에 서양식 훈장을 단 채 옥좌에 앉은 고종은 대한제국이 근대의 황제국임을 사진을 통해 선포하고 있다.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그림의 종이 사진틀에 끼워져 있는 이 사진은 1905년에 미국에서 파견된 아시아 순방단의 일원으로 내한한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Alice Roosevelt Longworth: 1884-1980)에게 고종이 하사한 사진이다. 고종은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고 미국의 '공주'인 앨리스 루즈벨트를 환대했으며 자신과 순종의 사진을 주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단은 사실상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비밀 협약(가쓰라-태프트 협약)을 도쿄에서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한국에 들른 것이었다.

1-5. 순종의 즉위와 한일강제병합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은 폐위를 당하고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된다.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즉위한 순종은 '한미신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에 내정 감독권을 내주었고,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일본의 경제침탈이 본격화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순종은 창덕궁에 머무르며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칭호가 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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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황실장례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의 장례사진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지막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고군분투했던 대한제국 황실 인물들의 노력이 좌절되고, 결국 국권 침탈이라는 결말로 귀결된 시대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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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1919년 1월 22일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애도기간 중인 3월 1일에 기미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이틀 뒤에 열린 3월 3일 국장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UPA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머물렀던 앨버트 테일러(Albert W.Taylor)는 3.1 기미독립선언문 입수해 전세계에 알렸으며, 고종국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사진은 고종국장행렬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어, 당시 고조되던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전하려는 시각이 드러난다.

“마지막 황제가 선조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증오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서가 아니라 후계자도 남기지 못한 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자유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메리 테일러(앨버트의 부인), 『Chain of Amber』 중에서

2부: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1910-1989)
2부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강점기를 살아내는 황실 후예들의 삶을 다룬다. 이들은 일본인과 의 결혼을 강요 받거나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 살았으며,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 그리고 의친왕의 아들 이건과 이우 등의 사진들은 비극적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왕족의 마지막 행로를 보여준다.

영친왕 이은 (1897~1970)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던 해인 1897년에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1920년에 일본황족의 딸 나시모토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8.15 광복 후 국내 정치 실세들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67세가 되던 1963년에 귀국하여 병상생활을 하다 1970년에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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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여사 (1901~1989)
일본 황족의 딸로 일본이름은 나시모토야 마사코이다. 1920년에 20세의 나이로 영친왕과 결혼해 이진(갓난아기 때 사망)과 이구 두 아들을 낳았다. 196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으며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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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 (1877~9155)
고종과 궁녀인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명성황후가 귀인 장씨와 함께 궁 밖으로 내보낸 후, 외갓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6세에 의화군에 봉해졌고, 17세에 김사준의 딸 김수덕과 결혼했다. 이듬 해에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미국 유학 중이던 24세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30세에 귀국하여, 일제의 감시 속에서 대한제국 육군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에 임명되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며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2남 9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78세에 별세했다.

덕혜옹주(1912~1989)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환갑 때 태어난 덕혜옹주는 고종의 각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지만, 고종 승하 후 총독부의 강요로 14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보내졌다. 고종의 빈자리를 대신해 덕혜옹주를 아버지처럼 아껴주던 순종황제가 승하한 후, 덕혜옹주는 19세가 되던 1831년에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전부터 앓던 조발성 치매증의 악화로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혼했으며, 외동딸이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해방 이후에도 국내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귀국을 거부당하던 덕혜옹주는 50세가 넘어(1962년)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낙선재에서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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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1912~1945)
의친왕의 아들로 13세에 일본유학을 떠나, 18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강요 받았지만, 24세가 되던 해에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야전 포병학교, 육군포공학교 등을 거쳐, 27세에 야전포병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 34세에 히로시마에 발령을 받아 복무하던 중,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박찬주 (1914~1995)
박영효의 손녀로, 22세에 이우와 결혼하여 이청과 이종을 낳았다. 남편을 잃은 후, 두 아들과 함께 운현궁에 거처하였다. 37세에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2년에 운현궁을 서울시에 매각하고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82세에 사망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흥선대원군 묘역에 남편 이우와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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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섹션: 왕 앞에 선 사진가들
조선의 사진술 도입과 정착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사진관을 운영한 사진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한국사진사의 여명을 밝힌 사람들이었고 황실과의 인연으로 혹은 촉탁으로 황실 가족의 초상이나 기념사진, 황실의 행사들을 촬영했다.
조선에 사진관이 개설된 것은 1882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인 거류지에서 일본인 사진관이 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어서 일본이나 중국에서 사진을 배운 화가 출신의 조선인들이 사진관을 개업하기 시작한다. 1883년에 황철과 김용원이, 1884년에 고종과 순종을 촬영하게 되는 지운영이 각각 사진관을 개업하면서 조선인에 의한 사진 정착의 길을 여는 듯했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사진을 일본의 문물로 본 군중들에 의해 이들의 사진관이 파괴 당함으로써 조선인 사진관은 1907년 김규진이 천연당사진관을 개업할 때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미국인 퍼시벌 로웰 이후, 왕을 촬영한 어진 사진사 중 그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총 네 명이다. 지운영과 김규진 그리고 일본인 촉탁 사진가인 무라카미 텐신과 이와다 카나에가 그들이다. 그들의 모습과 함께 사진 활동의 일부를 소개한다.









http://m.gogung.go.kr/gallery.do?cmd=contents&pageid=gallery1-5












1층 : 4전시실 왕실의 의례실 , 5전시실 대한제국과 황실실, 6전시실 천문과 과학Ⅰ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정치ㆍ외교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일본ㆍ미국ㆍ유럽을 통해 전기ㆍ철도ㆍ우편ㆍ금융ㆍ자동차ㆍ건축ㆍ신문ㆍ교육ㆍ의료ㆍ복식 등의 신기술과 문화체계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이 전시실에는 세계와 만나는 대한제국기의 유물, 근대기 신문과 황실 사진자료, 궁중 생활공간 재현, 황제ㆍ황후의 근대식 어차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표유물
고종황제 초상

고종황제 초상

시대 :1918년경
재질 :비단에 채색
크기 :162.5×100.0cm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초상이다. 원유관遠遊冠 대신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입은 것으로 보아 황제 등극 이후에 그려진 초상임을 알 수 있다. 배경은 휘장으로 장식하고 발 아래에도 휘장과 비슷한 무늬의 양탄자를 깔았다. 어진의 배경에 휘장이 드리워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얼굴과 의복 등을 강한 명암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도 이전의 어진 제작방식과 크게 다르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모두 12점이 제작되었고 현재는 6점만 전한다.
순정황후어차

순정황후어차

시대 :20세기 초
재질 :금속 · 나무
크기 :길이440.0cm,
폭 179.2cm, 높이 204.7cm
순종의 황후인 순정황후純貞皇后가 탔던 것으로, 영국 다임러DAIMLER사가 제작한 리무진이다. 7인승, 20마력,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으로 추정된다. 순정황후어차는 순종 어차보다 크기가 작으나 자동차의 형태나 장식이 순종어차에 비해 더욱 유려하다. 내부는 황실문장인 오얏꽃을 수놓은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으며 차체는 목재, 외부도장은 칠漆로 되어 있다. 운전석 뒤편 의자를 접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것은 순종 어차와 같다. 전세계적으로 3대만 남아 있고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자동차로 순종어차와 함께 세계 자동차 발달사는 물론 우리나라 자동차의 역사 및 황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친군영 발급 문서에 사용하던 인장

친군영 발급 문서에 사용하던 인장 親軍營

시대 :조선, 1883년(고종 20)경
친군영에서 발급되던 문서에 발급 기관 표시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서인文書印이다.
언더우드의『상투의 나라 - 한국에서의 생활』

언더우드의『상투의 나라 - 한국에서의 생활』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시대 :미국美國, 1904년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 (1851~1921 년)가 우리나라에서 겪고 느꼈던 것들을 쓴 책이다. 왕비의 시의侍醫였던 릴리아스는 고종을 ‘좋은 품성을 가진 친절한 신사’, 명성황후를 ‘진보적인 정책을 펼친 유능한 외교가’로 평가했다.
고종황제 즉위 40년 기념장

고종황제 즉위 40년 기념장

시대 :대한제국, 1902년(광무 6)
고종의 망육순望六旬(51세)과 즉위 40년 기념장이다. 앞면에는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靈壽閣’이라는 누각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기념문구와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새겼다.
전시공간
대한제국과 황실실
대한제국과 황실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g95&articleno=17235628&categoryId=849952&regdt=20121115194810


http://news.ichannela.com/list/3/all/20121204/512939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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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동아일보] 입력 2012-12-04 10:45:00 | 수정 2012-12-08 10:58:18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전에 나온 순종과 순정효황후 초상 (1970년). 왕과 왕비가 함께 찍힌 것으로는 최초의 사진인다.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덕혜옹주 결혼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의친왕의 아들 이우, 박찬주 부부의 사진(연도 미상)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http://korea.nomesdesign.com/%EB%A7%8C%EB%82%98%EC%84%9C-%EB%B0%98%EA%B0%80%EC%9B%A0%EC%96%B4-2013%EC%9D%98-%EC%82%AC%EC%A7%84%EB%93%A4/



Monday 30 December 2013
만나서 반가웠어, 2013의 사진들!








그림2그 어떤 해보다 멋졌던 2013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진들이 모두 우리를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덕수궁에서 열렸던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 ND에서도 소개되었던 『2013 서울사진축제-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 『라이언맥긴리-청춘, 그 찬란한 기록』, 그리고 느즈막히 서울을 찾아온 『점핑 위드 러브 전』과 『애니 레보비츠 사진전』까지 국내외의 우수한 사진전들이 줄을 이어 열렸던 바 국내의 사진 매니아들을 열광케 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1880-1989 전『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전』은 격동의 대한제국기에 찍혔던 왕실의 사진들을 전시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서양 열강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시절이자 사진을 갓 수용하기 시작했던 시대였다. 그 시기에 찍은 왕실 인물의 초상과, 왕실 관련된 행사 등의 사진들을 통해 대한제국기 왕실 인물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자기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는 정신을 이르는 ‘카파이즘’이라는 용어는 전쟁을 따라다니며 그 참상을 낱낱이 기록했던 로버트 카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2차 대전의 종군 기자였으며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고 숨졌던 로버트 카파의 100주년을 기리는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이 올해 한반도 정전 60주년을 기념해서 찾아왔었다. 정전을 기념하기 위해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한 카파의 사진전을 개최한다니 아귀가 맞아떨어지면서도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2013 서울사진축제-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 한국의 근현대사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한국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했던 『2013 서울사진축제-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는 스스로를 바삐 채찍질 하며 쉼 없이 달려왔던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과거에는 있었지만 현재에는 없는 것, 그리고 과거에 없던 현재만의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되려 보여주었던 전시였다.


http://useuser.tistory.com/54

http://train4world.tistory.com/2894




http://www.eojinmuseum.org/home/bbs/board.php?bo_table=exhibit_special&wr_id=9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1115_0011609125&cID=10201&pID=10200

명성황후·고종…사진 속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등록 일시 [2012-11-15 16:23:55]




【서울=뉴시스】유상우 기자 = 진위가 명확한 명성황후(1851~1895)의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조선 마지막 왕인 고종(1852~1919)의 비다.

그동안 명성황후라며 나온 사진은 석 장이지만 모두 진위 논란이 일었다. 평복 차림의 젊은 여인, 원삼을 입고 어여머리에 떠구지를 한 여인, 모시옷에 부채를 들고 찌푸린 얼굴로 앉아 있는 여인이다.

이 사진들은 1890년대와 1900년대에 발간된 외국의 잡지와 석판인쇄물, 저서, 사진첩들에 서로 다른 제목들이 붙여진 채 유포됐다. 그러나 모두 추정일뿐 명확하게 '이것'이라는 사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에 사진이 도입된 시기는 1880년대다.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장은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는 이유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살해위협을 받아 사진을 못 찍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한미사진미술관이 16일 덕수궁미술관에서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전을 개막한다. 대한제국 황실 사진의 역사를 망라했다.

명성황후를 비롯해 고종, 순종 등 대한제국 황실 원본 사진과 사료 등 200여점으로 꾸민다. 국립고궁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스미스소니언미술관 등 국내외 여러 기관의 협조로 각 소장 기관의 전시나 도서자료를 통해 소개된 것들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영친왕 이은(1897~1970)과 일본인 부인 이방자(1901~1989), 고종의 다섯째아들 의친왕 이강(1877~9155),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1912~1989), 의친왕의 아들 이우(1912~1945) 등 일제강점기를 보낸 황실 후예들의 사진도 볼 수 있다.



특별세션으로 황실과의 인연 혹은 촉탁으로 황실 가족의 초상이나 기념사진, 황실의 행사들을 촬영한 지운영, 김규진 등의 모습과 사진활동을 소개한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원본 사진을 통해 근대를 살아가는 왕실·황실 인물들의 행적과 역사적 현장을 바라보는 역사 사진전"이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기간 '황실 사진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연회가 열린다. 내년 1월13일까지 볼 수 있다. 02-2188-6000

swryu@newsis.com




http://www.samsamstory.com/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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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명성황후의 침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을미사변에 명성황후가 시해 당했던 옥호루(玉壺樓)를 볼 수 있습니다.
16세에 왕비가 되어 일찍이 그 총명함을 타고났던 명성황후는 대원군과의 대립관계 속에서도 정권을 유지하였지만
결국 1895년 새벽,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로고가 이끈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을미사변)


http://photom.co.kr/zbxe/?document_srl=239164&mid=photonews&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








제목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기간 2012-11-16~2013-01-13 장소 덕수궁미술관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국립현대미술관과 한미사진미술관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기획한 사진전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1880-1989>는 고종, 순종, 명성황후 등 대한제국 황실과 관련된 원본사진 200여점을 공개하며 근대 황실 사진의 역사를 총망라한다. 근대기에 최초로 유입된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제작, 유포한 고종 황제의 모습부터 진위 여부로 많은 논란을 일으킨 명성황후 관련 사진 등 격동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한 황실 인물들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사진 외에도 사료와 엽서, 신문 등 다양한 매체를 함께 전시해 대한제국의 입체적 이해를 도왔으며, ''황실 사진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어 근대 초기 사진사부터 오늘날 황실 사진이 갖는 의의를 짚어본다. 이밖에도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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